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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자기 인식: 최후의 개척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from edge.org)
2008/07/16   "이론의 종말" _크리스 앤더슨 [13]
자기 인식: 최후의 개척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from edge.org)
* 웹저널 Edge.org #270, January 7, 2009에 실린 original eaasy: SELF AWARENESS: THE LAST FRONTIER By V.S. Ramachandran 를 번역하여 올립니다.

** V.S. RAMACHANDRAN is a Neuroscientist, Director, Center for Brain and Cognition,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Author, Phantoms in the Brain.(국내 번역서: 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바다출판사)

{ } : 역자 덧글



자기 인식: 최후의 개척지

의식의 수수께기는 남아있는 과학의 문제들 중 하나이다. 두개골 속 찐득한 덩어리에 불과한 두뇌는 성간 공간의 광대함에 대해 고민할 수 있으며, 영이나 무한대 같은 개념과 씨름할 수도 있다. 더욱 심중하게, 두뇌는 그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온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논쟁의 여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구인가”란 모든 질문 중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감각질qualia의 문제와 자아self의 문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나의 동료인 후기 Francis Crick와Christof Koch는 의식consciousness이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경험적 문제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가치 있는 공헌을 하였으며, 몇 가지 정교한 설명을 제안하였다. 허나 나는 감각질의 문제가 더 단순하며, 그렇기에 “자아Self”에 뛰어들기 전에 일단 설명되어야 한다는 그들의 입장에 동의하진 않는다. 나는 바로 그 반대가 사실이라 생각한다. 나는 확연히 장담컨대, 이 에세이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자아의 문제는 풀릴 것이다. 하지만 감각질qualia은 아니다.

감각질 문제는 잘 알려져 있다. 내가 지적으로 고등하게 진보된 색맹 화성인이라 가정해보자. 나는 당신의 뇌를 연구해서, 당신이630{나노미터} 파장의 붉은{*} 빛을 보며 “붉은색”이라 말할 때 당신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리-화학적 사건들을 낱낱이 완벽하게 밝혀내었다{* ‘red’라는 내적 경험에 관련된 표현을 배제하여 외부 자극과 행동에 대한 물리적 묘사만으로 내적 상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시도하려는 성향주의dispositionalism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문장에서‘red’라는 표현이 튀어나온 것은 이 주석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하며 부적절하다}. 당신은 나의 과학적 기술description이, 내 관점에서는 완벽하더라도, 표현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소통될 수 없는 어떤 것, 소위‘붉음’에 관한 당신의 실제 경험을 누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공기 파장{**}의 중재 없이 당신의 뇌를 나의 뇌와 직접 연결(Bill Hirstein과 나는 이를 감각질-전선qualia-cable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것도 오직 내 색맹이, 색체 지각을 위한 두뇌 회로는 온전하지만, 눈의 수용체 색소{***} 손실로 인한 것일 때만 가능하다)하지 않는 이상에야 당신이 표현 불가능한‘붉음’의 감각질을 나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것이 고막에 닿으면 뇌는 파장을 소리로 번역하며, 특정한 음향은 음성으로 번역된다. 쉽게 말해서 대화speech}{*** 안구의 안쪽 벽인 망막에 배열된 광수용기들은 광자photon가 닿았을 때 전기신호를 발생시키는 색소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빛을 신호로 번역할 수 있다}. 감각질이란 당신의 경험 중에서 색맹 화성인인 내가 누락하는 측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제가 절대 풀리지 않거나, 아니면(경험론적 관점에서) 유사{즉, 가짜}-문제로 밝혀질 것이라 믿는다. 감각질, 그리고 소위 “순수하게 물리적인” 사건이란 뫼비우스의 띠의 양면과 같을지 모른다. {띠의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의 관점에서 그 둘은 완전히 다른 두 면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둘은 하나의 표면인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개미 수준의 관점을 초월—아인슈타인이 다른 맥락에서 했듯이—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반면, 자아의 문제는 경험론적인 것이며 과학을 통하여 해결, 혹은 최소한 그 한계까지 탐구 가능한 것이다.  만일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이는 과학 역사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신경학적 조건들은 자아가, 자아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큼 획일적인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보다는 자아는 개별적으로 분리하여 연구될 수 있는 다수의 구성요소들로 이뤄져 있는 것으로 보이며, 하나의 단일한 자아라는 개념은 환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렇다고 하여도 우리는 그 환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물어야 한다; 이는 자연 선택을 거쳐서 획득된 적응인가?)

자아의 다른 측면들을 묘사하는 다음의 질환들을 고려해보라.
•유체이탈 경험Out of body experiences: 우측 전두-두정 발작을 겪은 환자들은 허공으로 몸이 떠올라 아래에 놓인 자신들의 육체를 바라보았다고 보고한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유체이탈 된 영혼의 미신에 기여한다. 좌측 반구 발작이 일어나면 신비로운 존재를 느끼게 된다. 환자들은 왼쪽 어깨 뒤에서 쌍둥이 유령{아마도 이는 도플갱어 신화에 기여했을 것이다.}이 따라다니는 느낌을 받는다.

•신체절단애호증Apotemnophilia: 다른 면으로는 완벽하게 정상인 사람이 그의 팔이나 다리를 절단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갖는다. 우측 두정엽(SPL{상측 두정엽superior parietal lobule}로 알려진 부위의 일부)에는 보통 온전한 내적 신체상body image이 있다. 최근 우리는 이러한 환자의 신체지도에서 문제의 {잘라내고 싶어지는} 사족에 해당하는 부분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해당 사족의 이질화가 야기되는 것을 발견하였다.

가끔 환자들은 사지가 절단된 사람에게 성적으로 매료되는데, 우리가 추정하기로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S2{2차 체성감각영역the 2ndary Somatosenory region}에 유전적으로 특정된 미소인간homunculus이 있어서, 변연계와 시각영역의 판형template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를 통해 특정한 체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미적 선호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돼지는 사람이 아니라 돼지에게 매력을 느낀다. (이는 후각과 시각적 각인의 부가적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S2의 이미지에 팔다리가 하나 빠져있다면, 이는 신체절단에 대한 미적 선호로 번역될 것이다. 이는 (“정서적”) 편도체에서 시각처리 계층의 모든 단계로 연결되는 역행전사reserve projection{*}에 의해 조정될 것이다. {*정보입력의 흐름이 외부에서 내부의 통합구조로 이동한다고 할 때, 시각정보가 처리되어 편도체로 이동하는 것은 순행, 반대로 편도체에서 시각 처리에 영향을 주는 신경활동은 역행이다. 전사projection란 뉴런이 다른 뉴런 등으로 신경활동을 전달하는 것을 지시한다.}
• 성전환성Transsexuality: 한 여인은 그녀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스스로를 여성의 몸에 갇힌 남자로 느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환상 남근과 발기마저 경험한다. 모든 사람들은 단일한 성 정체성(혹은 자아)을 갖는다는 우리의 일상적 개념은 의혹에 빠졌다. 최소한 4개의 각기 다른 섹슈얼리티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외적인 해부적 구조와, 내적인 뇌-기반 신체상, 성지향성, 그리고 성정체성(남들이 당신이라고 생각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다. 보통 이 4가지 측면들은 태내 발달 단계에서 조응되지만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당신은 성전환자가 된다. (게이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언급한다.)

• 환상팔phantom arm을 가진 환자가 한 학생의 팔이 만져지는 것을 바라본다. 놀랍게도 환자는 그의 환상 팔이 만져지는 것을 느낀다. 그와 타인 사이의 경계는 사라진다.

• 코타르 증후군 Cotards syndrome; 환자는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며 이에 모순되는 모든 증거를 부정한다.

• 카프그라 증후군Capgras delusion; 환자는 그의 어머니가 그의 어머니를 닮긴 했으나 실은 사기꾼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환자는 자신의 집이 진짜 집의 복제품이라 주장한다. Bill Hirstein과 나 (그리고 Haydn Ellis 과 Andrew Young)는 이 고도로 특정한 망상이 뇌의 시각 영역과 정서 영역 사이 연결의 단절에 기인함을 보였다. 따라서 우리의 환자 David은 그의 어머니를 보았을 때, 그녀와 관련된 기억의 편린 사이에서 그녀를 알아본다. 하지만 어떠한 감정이나 익숙함의 충격이 유발되지 않으므로, 그는 자신의 기이한 곤경을 그녀가 사기꾼이라 말함으로써 합리화해낸다. 이러한 환자들이 보통 지적으로 정상이며 다른 정신적 측면 대부분에서 안정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망상을 놀랍고 연구할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망상의 선택적 특성이다.
또한 David은 특정 종류의 추상화에 어려움을 겪었다. 새로운 사람을 여러 다른 맥락에서 연달아 만난 후에 그 사람에 대한 지속적인 동일성을 구성하기 위해선 그 경험들을 추상화하여 통합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사람을 두 번째, 세 번째, 혹은 n번째 보아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 경험들을 통합하여 한 사람으로 묶을 수 없었다. 더 놀랍게 David은 가끔 자기 자신을 복제하기도 했다! 종종 그는 “또 다른 David은 휴가 중이다”라고 언급했다. 마치 당신이나 내 안에서 이뤄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자신의 연속적인 일화들이 묶이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이를 정신병적 맥락의 MPD(“다중인격장애multiple personality disorder")와 혼동하지 말라. MPD는 종종 법의학적 이유나 보험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의심스러운 진단이며, 게다가 수시로 심하게 변동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종종 MPD 환자에게 청구서를 두 장 보내도 정말 둘 다 지불할지 보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반면, David같은 환자는 우리에게 자아성selfhood의 신경적 기저에 대한 진정한 통찰을 줄지 모른다.
• 또 다른 장애에서, 전측 대상회frontal cingulate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은 "무동성 무언증akinetic mutism"을 나타낸다. 완전히 각성된 채로 침대에 누워 있지만 말도 할 수 없으며 걷지도 못한다. 사실 어떤 식으로도 그 주변의 사람이나 사물과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가끔 이런 환자들이 (특정 약물이 주입되어) 깨어나면, “내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자아의 주요한 속성이 선택적으로 손실된 것 같았다. 즉, ”자유 의지”라는 속성이 말이다.

• 더욱 기괴한 것은 “전화기 증후군The telephone syndrome이라 불리는 것이다. 한 환자(John이라 하자)가 그의 아버지(예를 들어)를 직접 만나면, 그는 시각적 자각 없이, 무동성 무언증을 나타낼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 돌연 정신을 차리고 정상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S. Sriram 과 Orrin Devinsky, 사적 교신 참조.) 부분적으로 각성된 시각적 John과 전화로 대화하는 (별개의 자아를 가진) 청각적 John, 이 두 명의 John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감각 영역에서부터 운동 출력 사이 모든 단계에서 존재하는 자아의 분리도degree of segregation를 암시하며, 이러한 분리는 이전에 누구도 추측해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으로 거의 공리로서 간주되고 있는 자아의 두 측면을 살펴보자. 첫째는 그것의 본질적으로 사적인 본성이다. 누군가와 공감할 수는 있지만, 그녀의 감각을 경험하거나 그녀 안으로 녹아 들어버리는 정도까지는 (folie a deux{감응성 정신병, 한 명의 정신병 증상이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는 현상}같은 병리적 상태나 낭만적 사랑을 제외하면) 불가능하다. 둘째는 그것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는 점이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자아란 모순어법oxymoron{기민한 천치}이다. 이 두 공리는 질병 속에서 분리될 수 있다; 자아의 다른 측면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은 보통 사람이 만져지는 것을 봄으로써 문자 그대로 환상지phantom limb가 만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ndrome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의 육체가 텅 빈 껍데기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질환들을 신경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은 보통의 자아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조명하는 일을 돕는다.

이러한 증후군들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Giacomo Rizzolatti, Victorio Gallase에 Marco Iacoboni에 의해 발견된 거울 뉴런을 동원해야 한다. 전전두 피질prefrontal lobe에 있는 뉴런들은 숙련된, 혹은 반(半)숙련된 동작(예를 들어 입에 음식을 떠 넣거나, 레버를 당기거나, 단추를 누르거나 등등)들과 협응하며 정교한 신호를 척추를 따라 내려 보낸다. 이는 “보통의” 운동명령 뉴런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거울 뉴런으로 알려진 일부는 비슷한 동작을 하는 다른 사람을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발화한다. 이는 마치 뉴런 (엄밀하게는 일부 뉴런들로 구성된 신경망)이 시각 입력으로 다른 사람의 동작에 대한 일종의 “가상현실 시뮬레이션”을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그녀와 공감하고, 세상을 그녀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다.

Edge에 기고한 예전 논고에서, 나 또한 이러한 뉴런들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을 도울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초기{감각이나 낮은 수준의 지각 처리 과정} 뇌 처리과정에 대한 2차 표상, 혹은 메타표상을 구성하기 위해, 원래 그랬듯이, “내향적inward”으로 바뀔 수 있다고 추측하였다. 이는 내성introspection, 그리고 자아 인식과 타인 인식의 상호관계의 신경적 기전일 수 있다. 여기에 무엇이 먼저 진화했느냐에 대한 닭-달걀 문제가 존재하는 것은 확연하나, 이는 나의 주요 논의와는 무관하다. (Nick Humphrey가 Edge에 기고한 글을 참조할 것.) 핵심은 현생 인류의 특징인 자아에 대한 성숙한 표상을 형성하도록 상호 강화된 두 개의 공진화된 특질{자아 인식과 타인 인식}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는 자의식이 좀 강하다I feel a bit self conscious”고 말할 때, 실은 나를 의식하는 타인들을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자기 비판적인 것이나 “자기 연민”을 경험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침팬지가,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구걸하는 침팬지를 불쌍히 여길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침팬지가 자기 연민을 경험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나는 또한 이 뉴런들이 우리의 선조들에서 타인의 외부적 시각적 관점을 채용하기 위하여 애초에 발현하였다고 해도, 타인의 은유적 관점을 채용(“나는 그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등등)할 수 있도록 더 진화하였다고 제안한다. 어떻게 그것이 일어났는지는 심히 혼란스러울지라도, 이 또한 진화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다.

“촉각 거울 뉴런” 또한 존재한다. 이는 당신의 피부가 만져졌을 때뿐 만 아니라, 누군가가 만져지는 것을 볼 때에도 발화하는 것이다. 이는 흥미로운 질문을 촉발한다; 자극에 대해 뉴런은 어떻게 아는 것일까? 왜 이런 뉴런들은 당신이 타인에게 전달된 그 촉감을 말 그대로 느끼지 않게 하는가?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째는 당신의 피부 속의 촉각 수용기가 피질의 다른 촉각 뉴런들(비-거울 뉴런들)에게 만져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 무효 신호는 선택적으로 거울 뉴런들의 출력의 일부를 묵살한다. 이는 왜 우리의 절단 수술을 받은 환자가 우리 학생이 만져질 때 촉각 감각을 경험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사족의 절단은 신호의 무효화까지 제거한 것이다. 당신과 타인 사이의 유일한 장벽이 당신의 피부 수용기에 불과하다는 것은 확실히 섬뜩한 생각이다.
당신이 보는 모든 사람을 흉내 내거나 타인의 촉각 감각을 문자 그대로 경험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전두엽이 부분적으로 거울 뉴런의 출력을 억제하기 위한 피드백 신호를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완전히 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가능하다면 애초에 거울 뉴런을 갖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측대로, 만일 전두엽이 손상된다면 정말로 사람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반향모방증echopraxia”).

최근 증거들은 고통, 혐오, 안면 표현 등에 관련된 거울 뉴런들도 있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어쩌면 외부에서 관찰 가능한 모든 정서 표현에 대해 존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를 “공감” 뉴런, 혹은 ‘간디’ 뉴런이라 부른다.) 이들 중 일부는 전측 대상회anterior cingulate에 있고, 일부는 뇌섬엽insula에 있다.

당신이 자신의 개성과 사생활에 대해 갖는 모든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내게서 당신을 분리해 내는 유일한 것은 당신 전두엽 안에서 거울 뉴런과 상호작용하는 신경회로의 작은 부분집합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언급한다. 이를 손상시키면 당신은 “정체성을 잃는다”. 당신의 감각 체계는 다른 이들과 섞여버리기 시작한다. 철학자의 사고 실험에 등장하는 유명한 Mary{색맹인 색채 연구자 Mary. 앞에서 예시로 든 색맹 화성인에 선행하는 철학적 사고실험}처럼, 당신은 '그들의' 감각질을 경험한다.
우리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신경-정신병적 증상들이 “나-너” 혼동과 빈약한 에고ego 분화{id/ego/super-ego}를 야기하는 회로결함에서 발생한다고 제안한다. Lindsay Oberman, Eric Altschuler 그리고 나는 자폐아동들에서 다음과 같은 강력한 예비적 단서를 발견하였다; 자폐아동들은 거울 뉴런의 결손을 갖고 있는데, 이는 왜 그네들이 모방, 공감, (역할극이 요구되는) “소꿉놀이”를 잘 못하는 것을 설명할 뿐 아니라, 가끔 대명사 ‘나’와 ‘너’를 혼동하고, 내성introspection에 어려움을 겪는지 까지도 설명할 수 있다. 심지어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는 프로이트적 현상인 “투사projection”도 유사한 유래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난 당신을 사랑해”라는 말은 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당신은 나를 사랑해”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아의 궁극적 모순인 코타르 증후군Cotards syndrome(가끔 “나는 죽었다.” 혹은 “내 몸이 썩는 냄새가 난다.” 등이라 주장한다)으로 돌아가보자. 우리는 이것이 두 손상의 조합으로 발생한다고 추정한다. 첫 번째 손상은 카프그라Capgras와 유사하지만 훨씬 깊이 침투된 것이다. 이 결과 감정이 시각 중추와 단절된 것뿐 아니라, 모든 감각들과, 심지어 감각의 기억들과도 단절된다. 따라서 세상 전체가 사기꾼이, (어머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 된다. 두 번째 가능한 손상은 거울 뉴런과 전두 억제 구조간 상호작용의 기능장애이다. 이는 자아가 타인(실은 세상 전체)과 독립적인 존재라는 느낌을 붕괴할 수 있다. 세상을 잃고, 자아를 잃는 것—이는 당신에게 있을 수 있는 상태 중 죽음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이는 아직 어떤 면에서도 완전히 발전된 설명이 아니다; 단지 이 불가해한 증후군들을 설명하기 위한 사고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언급하는 것이다.


이제{Capgras Syndrome의 거울상으로서} 이 동일한 회로들이 측두엽에서 시작된 발작(TLE혹은 측두엽 간질 temporal lobe epilepsy)을 겪을 때 가끔 나타나듯 과활동적이 되었다고 상상해보자. 그 결과 환자는 세상에 대한 감각인식의 강렬한 고양을 느낄 것이며, 모든 존재에 대해서, 자기 자신과 우주Cosmos사이 어떤 장벽도 느끼지 못할 경지에 이르는 격양한 공감{소위 물아일체}을 느낄 것이다. 이는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체험의 기반이다. (당신은 모든 이기심을 버리고 신과 하나가 된다.) 사실 다수의 역사적인 종교 지도자들은 TLE를 갖고 있었다. 나의 동료, 후기 Francis Crick의 제안은, 신부들과 마찬가지로, TLE 환자들이 뇌 속에 특정한 비정상 신경전달물질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물질을 “신독(神毒)theotoxins”이라 불렀다. (그는 철학자 Pat Churchland에게, 종교라는 것이 자발적인 성인들 간의 사적인 모임인 한에는, 종교 그 자체에 대해 어떠한 이견도 없다고 한 적이 있다.)

신비한 경험에 대한 측두엽의 연관이 그 자체로 모든 장벽의 궁극적 소멸을 표상하는 추상적인 신(힌두 철학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서둘러 덧붙인다. 어쩌면 TLE 환자들이 진실을 본 것이며,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TLE이 없지만, 뇌리에 침식하는 음악의 선율을 들을 때나, 북극의 오로라 aurora borealis를 바라볼 때나, 망원경을 통해 목성의 달을 볼 때, 개인적으로 절대적 존재의 깨달음 epiphanies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깨달음 epiphanies 중에 나는 순간 속의 영원성을 보았으며, 모든 사물 속의 신성함을 보았다. 또한 실제로 우주와 합일함을 느꼈다. 이런 경험에 있어서 “진실 혹은 “거짓”은 존재하지 않는다—단지 그 경험들은 그 자체이다; 단지 현실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다음은 화제를 유체이탈 경험으로 돌려보자. 이 글의 독자 같은 보통 사람이라도 때때로 자기 자신에 대해 “분리된” 외부적 시점을 (거울 뉴런 같은 뭔가를 이용하여) 취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분리된 시점을 경험하는 것이 완전히 부풀어 오른 망상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신경체계(예를 들어, 전두구조와 피부 수용기에서 보내는 억제)가 현실에 붙잡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측 전두-두정 영역의 손상이나, (동일한 회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케타민 국소마취에 의해 억제가 제거되면, 당신은 자신의 육신을 떠나기 시작하여 어떤 고통도 느낄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당신은 자신의 통증을 마치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주머니쥐opossum{잡히면 죽은체 하는 미국 주머니쥐}적 이탈은 긴박한 응급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당신은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육체가 강간당하거나 사자에게 짓이겨지는 광경을 바라보게 된다. 이런 반사는 정상적인 자기방어(포식자를 속이기 위해 가만히 누워있기)이나, 인류에게 남아있는 진화적 흔적은 극단적인 스트레스 조건에서 “분리적” 상태로서 나타날 수 있다.

흔히 알려진 “일원성”에 대한, 혹은 자아의 내적 일관성 역시 신화에 불과하다. 우측 반구의 발작으로 왼팔이 마비된 환자들의 대부분은, 실제로 그래야 하듯이, 그 마비에 대해 호소한다. 하지만 우측 SPL (그리고 아마도 뇌섬엽insula)의 “신체상body image” 표상에 추가적 손상을 입은 일부 환자들은 그들의 마비된 팔이 그들의 것이 아니라 주장한다. 어떤 환자는 그 팔이 그의 아버지 혹은 배우자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치 팔에만 선택적으로 “카프그라Capgras”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런 증후군들은 “나는 이 몸에 고정되어 있다” 혹은 “이것은 나의 팔이다” 같은 기본적인 가정들에 도전하며, “소속성belongingness”이 자연선택을 통하여 고정배선 된 근본적인 뇌기능임을 제안한다. 우리의 호미노이드hominod{유원인} 조상들에게 주어졌을 확연한 선택적 이득 때문이다. 어쩌면 이 병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동차의 왼쪽 흙받기의 소유권(혹은 손상)을 부정하고 그의 어머니의 차에게 속하는 것으로 돌릴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에 대해선 거의 어떤 한계도 없어 보인다. 내가 최근에 본 지적이고 의식이 명료한 한 환자는 그녀의 오른쪽 팔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 그녀 무릎 위에 놓인 꼼짝 않는 왼쪽 팔은 “테이블 밑에 숨어 있는” 그녀의 아버지의 것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 왼손으로 코를 만져보라 부탁하자, 그녀는 온전한 오른손으로 마비된 손을 잡아(후자를 마치 코를 만지기 위한 “도구”처럼 사용하였다!) 올렸다. 거기에 누군가는 분명 그녀의 왼쪽 팔이 마비되었으며, 무릎 위의 그 팔이 그녀 자신의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나와 대화한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 “아버지의 손”을 그녀 쪽으로 들어 올려 그 팔이 그녀의 어깨에 붙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수긍하였지만 여전히 그 팔이 그녀 아버지의 것임을 주장하였다. 상호모순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호 불일치적 신념들을 유지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기이하게 보이겠지만 실은 우리 모두도 때때로 같은 일을 한다. 나는 인격적 신—하늘 위 어딘가에서 그를 지켜보는 늙은 이—에게 기도하는 저명한 이론 물리학자들 여럿 알고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기도가 위약placebo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둬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약임을 알고 있어도 그 약이 효과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에 대해서 알고 난 후엔, 즉시 기도하기 시작했다. 두 명의 Ramachandran들이 있는 것이다. 한 명은 짓궂은 회의론자이며 다른 한 명은 독실한 신자이다. 다행히도 나는 Darwin이 이것 때문에 고뇌하였던 것과는 달리, 이러한 정신의 양가적 상태를 즐긴다. 이는 Escher의 판화의 즐거움과 다르지 않다.

지난 십 년간 의식과 자아의 본성에 관한 신경과학자들의 관심은 엄청나게 재귀resurgence해왔다. 단일 뉴런 전기생리학electrophysiology에서 (수백의 뇌 영상 연구를 포함한) 거시적 뇌 해부학에 이르는 다양한 각도에서 이 문제가 접근되었다. 허나, 빠져있는 것은 “심리-해부학”이라 할 수 있는, 어떤 복잡한 정신 능력들에 대해, 등등하게 특정한 세부사항들을, 특화된 신경 구조의 동등하게 특정한 활동들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연구이다. 비유로서, 유전적 코드의 발견을 들어보자. Crick과 Watson은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내었으며, 순간적으로 두 나선 가닥의 상보성이, 유전에서 부모와 자손의 상보성에 대한 은유임을 깨달았다. (돼지는 돼지를 낳는다. 당나귀가 아니라.) 달리 말해, DNA의 구조적 논리는 유전의 기능적 논리를 받아 적고 있는 것이다. 신경과학의 영역에서는 이처럼 기능과 구조를 정밀하게 대응시킬 급진적 통찰이 없었다.

이 목표를 성취하는 한 방법은, 본고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신경학과 정신의학의 접점에 놓인 증후군들을 탐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 두뇌의 본유적 복잡성을 고려할 때, DNA같은 극적인 단일 해법이 있을 것(나는 이를 배제하지 않지만)같진 않아 보인다. 허나 {지금보다} 더 정교한 차원에서 그러한{신경학과 정신의학의} 통합이 가능한 많은 예들 역시 있을 수 있으며, 이는 검증 가능한 예측과 새로운 치료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심지어 마음에 대한 대통합이론—물리학자들이 중력이론과 상대성이론, 그리고 퀀텀 역학을 통합하기 위해 찾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으로 가는 길을 닦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러한 이론이 나타나면, 우리는 무념의 상태에서 이를 받아들일 수도, 아니면 “이제 자아의 문제를 풀었으니, 또 뭐가 있을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by Solleo | 2009/01/11 18:40 | 학습만화(07~) | 트랙백 | 덧글(0)
"이론의 종말" _크리스 앤더슨

[Originally published the cover story, "The End of Science", Wired Magazine: Issue 16.07]

이론의 종말

자료의 홍수 앞에 과학적 방법론은 쇠락하는가?
_ CHRIS ANDERSON (Editor-in-Chief of "Wired" Magazine, and the author of "The Long Tail")
 

Illustration: Marian Bantjes
 
"모든 모형은 틀렸다, 하지만 일부는 쓸만하다."
라고, 통계학자 George Box가 30년 전 주창하였고, 그가 옳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었나? 오직 모형만이, 우주론적 방정식들에서 인간행동에 관한 이론들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혹여 불완전하더라도, 우리 주변의 세상을 설명할 수 있어 보였다. 지금까지. 오늘날 Google 같은, 광대하고 풍성한 정보의 시대에 성장한 회사들은 굳이 잘못된 모형에 기댈 필요가 없다. 사실, 그들은 모형 자체가 필요 없다.
 
60년 전, 디지털 컴퓨터에 의해 정보는 가독적이 되었다. 20년 전, 인터넷에 의해 가용적이 되었다. 10년 전, 최초의 검색 엔진 정보 수집기들이 정보를 하나의 데이터베이스로 바꾸었다. 오늘날 구글을 비롯한 회사들은 역사상 최고로 '측정'된 시대를 날아들며, 대규모의 자료를 인간 조건의 실험실처럼 다루고 있다. 이들은 페타바이트Petabyte 시대의 아이들이다.
 
페타바이트 시대는 다르다. 왜냐하면 많은 것은 다른 것("more is different")이기 때문이다. 킬로바이트는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되었다. 메가바이트는 하드 디스크에 저장되었다. 테라바이트는 디스크 배열에 저장되었다. 페타바이트는 구름에 저장된다. 이 진보를 거쳐가며, 우리는 서류철의 비유에서 시작해서 캐비넷, 도서관까지 비유를 확장시켰으며, 페타바이트까지 확장된 지금은, 글쎄, 더 이상 쓸만한 집합적 비유가 남아있지도 않다.
 
페타바이트 수준에선, 정보는 삼, 사차원 정도로 단순한 분류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불가지 차원의 통계적 문제가 된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요청한다. 우리로 하여금 자료의 보루--총체성 속에서 시각화될 수 있는 어떤 속성--을 포기토록 요구하는 접근을. 이는 우리에게 일단 수학적으로 분석한 후에 맥락을 구성하게끔 강요한다. 예를 들어, Google은 오직 응용수학만을 이용하여 광고업계를 평정했다. Google은 문화니, 광고의 규범에 대해 일절 아는 척하지 않았다. 대신, 다만, 더 좋은 자료와, 더 좋은 분석도구가 있으면 승리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뿐이다. 그리고 Google은 옳았다.
 
Google의 설립 철학이 말하는 바는, 왜 이 페이지가 저 페이지보다 훌륭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진입링크의 통계치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떤 의미론적 분석이나 인과론적 분석도 필요 없다. Google은 바로 이 방법을 이용하여 해당 언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번역을 하는 것이다(동등한 총체적 자료가 주어진다면, Google은 불어를 독어로 번역하듯 간단하게 클링곤어{스타트렉에 나오는 전투종족의 언어}파시{페르시아어}로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바로 이것이 광고나 싸이트 내용에 대해 어떤 것도 이해하지 않은 채로 싸이트 컨텐츠에 적합한 광고를 제공하는 방법인 것이다.
 
지난 3월의 O'Reilly Emerging Technology Conference의 연설에서, Google의 연구소장인 Peter Norvig는 George Box의 격언에 대한 개정을 제안하였다: "모든 이론은 틀렸다. 그리고 점차 이론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
 
이는 대량의 자료와 응용수학이 다른 모든 도구들(세상에 나타났을지도 모를)를 대체하는 세상이다. 인간행동에 관한 모든 이론에서 벗어나서, 언어학에서 사회학으로. 분류학이니, 존재론이니, 심리학 같은 건 싹 잊어버려라.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 따위를 누가 알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행동들을 사상초유의 충실성을 유지하며 추적하고 측정할 수 있다. 자료만 충분히 모이면, 그 다음은 숫자들이 스스로 말한다.
 
허나, 여기서 논하는 목표는 광고가 아니다. 과학이다. 과학적 방법론은 실험 가능한 가설들 위에 세워졌다. 모형들이란, 대부분의 경우, 과학자들의 마음 속에서 시각화된 체계이다. 이 모형들은 시험되고,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관한 이론적 모형들을 실험은 승인하거나, 기각한다. 이것이 지난 수백 년간 과학이 해온 방식이다.
 
과학자들은 상관관계가 인과관계가 아님을 인식하도록 훈련 받았기 때문에, 단순히 X와 Y간의 상관(단지 우연일 수 있으므로)에 기초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두 현상을 연결하는 현상의 기저에 놓인 작동기제를 이해하여야 한다. 일단 모형을 세우면, 확신을 갖고 자료들을 연결 지을 수 있다. 모형 없는 자료는 소음에 불과하다.
 
하지만 광대한 자료 앞에서, 과학을 향한 이 접근--가설화, 모형, 시험--은 진부한 것이 된다. 물리학을 생각해보라. 뉴턴의 모형은 진실에 대한 조야한 근사값들이었다(분자 수준에선 틀렸지만, 여전히 쓸만한). 백 년 전, 통계적으로 기반한 퀀텀 역학은 더 나은 그림을 제시했다. 퀀텀 역학 역시 또 하나의 모형이지만, 또 그렇듯, 역시, 흠이 있지만, 더 복잡한 이면의 현실에 대한 스케치임에 틀림없다. 물리학이 지난 몇 십 년(자료가 고갈된 학과의 "아름다운 이야기"{초끈이론 등} 시절)동안 n차원의 대통합모형에 관한 이론적 공론으로 휩쓸린 이유는, 가설을 기각하기 위한 실험을 실행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에너지가 너무 강하다. 가속기가 너무 비싸다. 등등.
 
이제 생물학도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우성적", "열성적" 유전자들에 대한 멘델적 절차를 엄격하게 선도하는 모형들은, 뉴턴의 법칙보다 훨씬 더 심한 현실의 단순화로 드러났다. 유전자 단백질 상호작용의 발견과 후성설의 다른 측면들은 DNA에 대한 운명론적 관점에 도전하였으며, 심지어 환경이 세습적 특질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한 때 유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증거들까지 제시하고 있다.
 
짧게 말해, 우리가 생물학에 대해 배울수록, 이를 설명할 수 있는 모형에서 멀어지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젠 더 나은 해결책이 있다. 페타바이트 덕분에 우리는 "상관으로도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모형을 찾아 헤매는 것을 그만둘 수 있다. 뭐가 나타날지에 대한 가설 없이도 자료를 분석할 수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컴퓨팅 클러스터에 숫자들을 때려 넣고 통계적 알고리즘이 패턴들을 찾아내도록 할 수 있다. 과학이 찾아낼 수 없었던 패턴들을.
 
이 방식의 가장 훌륭한 실용적 예시는 J. Craig Venter가 사용한 '샷건 유전자 시퀀싱'이다. 고속 시퀸서들과 여기서 나오는 자료를 통계 분석할 수 있는 슈퍼컴퓨터 덕분에 Venter는 개별 조직을 시퀀싱하는 것에서 생태계 전체를 시퀀싱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2003년, 그는 Cook 선장{18세기 영국왕립해군의 선장, 최초로 호주 동쪽 연안과 뉴질랜드를 탐색한 유럽인}의 항해를 추적하며 광대한 바다를 시퀀싱하기 시작했으며, 2005년엔 공기를 시퀀싱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박테리아 와 기타 생명체 수천 종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한다"는 말에 독자들이 Darwin과 되새의 스케치들을 상기한다면, 과학의 옛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지 모르겠다. Venter는 그가 발견한 종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 그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생태학에 대한 다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심지어 전체 지놈조차 모른다. 그가 아는 것이라곤 오직 통계적인 "삐릭!"(blip) 뿐이다. 즉, 데이터베이스 내에 다른 시퀀스와 다른, 특유한 시퀀스란 새로운 종을 의미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시퀸스는 다른 시퀀스--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종들과 유사한--와 상관관계를 가질 수 있다. 그런 경우, Venter는 그 생물에 대해 몇 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태양을 고유의 방식으로 에너지로 변환한다든가, 동일한 조상에게서 나온 후손들이라든가. 하지만 이것 말고는, Google이 Myspace 페이지들에 대해 갖는 모형에 비해, 별반 나을 바 없는 모형을 갖고 있는 셈이다. 단지 자료일 뿐이다. 허나, Google 수준의 컴퓨팅 자원으로 분석함으로써, Venter는 동세대 누구보다도 더 크게 생물학을 진보시킨 인물이 되었다.
 
이 종류의 사고방식이 대세가 될 목전에 이르렀다. 2월에, 국제과학제단the National Science Foundation은 클러스터 탐사the Cluster Exploratory를 공표했다. 이는 6개 대학의 시초pliot 연구팀들과 연계하여, Google과 IBM에 의해 개발된 대규모 분산 컴퓨팅 플렛폼에서 실행되도록 설계된 연구들을 제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다. 이 클러스터는 1,600개의 프로세서, 테라바이트 단위의 메모리, 수백 테라바이트의 저장장치와, IBM의 Tivoli{96년 IBM이 인수한 Tivoli의 시스템 관리 플렛폼}Google File System{구글의 분산 파일 저장 방식}Map Reduce{페타바이트 규모의 병렬 컴퓨팅을 위한 프레임워크}의 오픈소스버전등의 소프트웨어들로 구성될 것이다. Early CluE 프로젝트에는 뇌와 신경계의 시뮬레이션, 그리고 wetware와 software 중간 쯤에 위치한 기타 생물학 연구들이 포함될 것이다.
 
이정도 규모의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도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한 기회다. 막대한 규모의 자료들의 새로운 가용성은, 이 숫자들을 통째로 씹어먹을 수 있는 통계적 도구들과 함께, 세상을 이해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상관은 인과를 대체한다. 일관된 모형이나 통합된 이론, 어떤 역학적 설명도 필요 없이, 과학은 진보할 수 있다.
 
우리의 옛 방식에 집착할 이유는 없다. 이제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 과학은 구글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원문: "Edge" 재단 홈페이지 http://www.edge.org/3rd_culture/anderson08/anderson08_index.html

+조악한 번역을 개선시키는 참여 대환영


이글루스 가든 - 하루에 한 장~ 꾸준히 번역하기
by Solleo | 2008/07/16 18:08 | 학습만화(07~) | 트랙백(2) | 핑백(1) | 덧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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