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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한 표지에 예의 소문자 <i>가 제목으로 적혀있는 두꺼운 책이었다. 종이도 두껍다. 표지도 두껍다. 이 무지개떡 같은 종이 뭉치는 책이라기보다는, 뭐랄까, 스티로폼이나 쿠션같다. 그 소문자 <i>를 사용하여 돈을 많이 벌은 남자에 대한 책이다. 아니 사실 그 소문자 <i>는 예전부터 늘 누군가 다른 누군가가 이미 식상하게 써왔던 것 같은데. 정말 툭하면 i 뭐시기, 또 툭하면 e 뭐시기, u 뭐시기를 끝으로 마침내 정말로 지겹고 식상한 짓이라는 걸 이제는 모른 척 할 수 없다는 데에 어느정도 동조한 것도 같았는데, 이 남자는 그 후에 다시 i 뭐시기를 써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 남자가 정말 돈을 많이 벌었을까. <매그놀리아>에서, 머리를 기르고 헤드셋을 쓰고 바지를 내리고 하얀 팬티바람으로 뒤구르기 재주넘기를 여기자 앞에서 해보였던 탐 크루즈같은 모습으로, 그 남자-별별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래서 돌아온 영웅으로 포장되는-는, 정말 돈을 많이 벌었을까. 정말 그렇게 열정이 넘치고 영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나.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 관한 짤막한 성공담을 쓸데없이 지루하게 늘린 문장으로 쿠션에 솜을 채워넣듯이 우겨넣은 무지개떡 색의 책을 들고 여기 서점에 서 있다. 나는 이 책이 읽고 싶을까. 사람들은, 물론 이 쪽 분야의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그를 일종의 메시아처럼 느끼는 것도 같았다. 사실 누구나 그러한 상징을 바라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곤란이 자기 자신의 게으름과 무력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악하고 강력한 존재의 의지와 계획에 의한 것임을 바라고 있었다. 악을 인식하기 위해선 그에 비등한 거대하고 선한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멀리에 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더 커보여야 한다. 분명히 사람들은 그러한 상징을 원하고 있다. 누구든 그렇게 보이는 자가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들을 압도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돈을 많이 벌었고, 심지어는 그 남자 본인도 아니고 그 남자에 대해 쓸모없는 얘기들을 늘어놓는 사람들까지도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중에 일부는 다시 그 남자에게로 가겠지만. 그런데 나는 이 책이 읽고 싶은 걸까. 목차를 훑어 본다. 책을 처음 볼 때는 목차를 주의깊게 보아야 한다. 목차를 보면 이 책이 읽을만한 책인지, 어떤 내용이 나올지, 얼마나 재미가 있을지 등등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생각나는대로 그럴싸한 문구를 주워섬긴 듯한 목차도 있고, 미리 쇼핑 목록을 작성하여 일주일에 하루 정해진 날짜에 본 장바구니의 영수증 같은 목차도 있다. 이 책은 어쩐지 별 것 없이 어쩌다 돈 좀 만진 사장님을 칭송하는 사보같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이 재미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이 책이 싫다. 이런 책이 이렇게 크게 출판되어 서점에 나와있고, 또 이렇게 비싸게 팔린다는 것도 싫다. 재미없다. 지루한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이 왜 이렇게 신경쓰이는 걸까. 그 남자를 칭송하는 글을 읽기 위해 그 남자를 칭송하는 지루한 칭찬을 늘어놓은 커다랗고 무거운 책을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읽는 다는 것은 정말로 바보 콧구멍 같은 짓거리임에 틀림이 없다. 이렇게 커다란 서점에서는 늘상 이런 바보 콧구멍 같은 짓거리가 벌어지고 있다. 나도 늘 그런 짓을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책의 간지를 펼친다. 자성을 띈 알루미늄 스티커가 여기 있나? 앞장에는 없고, 뒷장에 있나? 어라? 없나? 왜 없지? 원래 없었나? 아니 잡지 같은 것에는 있지 않았나? 주변을 둘러본다. 직원이 어디에 있나. 주변 사람들은 혹시 나를 보고 있나. 글쎄. 나는 워낙에 약간 주변 배경에 도드라져 보이긴 하지만,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혹시 그게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키가 큰 남자 직원이 성큼성큼 다가와서 손목을 비틀고 '잠깐 뒤로 가시죠'라고 속삭이는 건가? 아니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다 내가 그 조그만 빨간 도장이 정수리에 찍히지 않은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계산이 된 물건임을 표시하는 종이띠를 두르지 않은 책을 들고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고, 보고 있지만, 아무도, 심지어 직원들까지도, 그저 모른척 하고 있는 걸까? 나한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나를 보고 있나? 서점 정문에 설치된 도단방지장치 사이를 통과할 때는 양쪽 귀에 피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느낌이 팽팽하게 귓볼을 잡아당겼다. 뒷덜미를 움츠리지 않으려고 일부러 어깨에 힘을 주어서 뒤로 젖혔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둘, 셋. 하지만 정문을 통과하는 것은 사실 너무도 맥빠지고 간단하게 스윽 지나갔고, 아무도 내가 책을 훔쳤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다섯 걸음을 더 걷고 모퉁이를 돌아서 책을 꺼내 들었다. 가슴이 뛰고 눈이 충혈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태연하고 지루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당장이라도 옆에 커다란 은색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그 곳을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꺼내든 책을 손에 들고 집까지 올 수 있었다. 물론 그 책은 지독히도 재미없었다. 몇 번인가 심심해서 뒤적거려 봤지만 역시 지루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었다. 언젠가 집에 놀러온 형에게 가져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형 역시도 몇 줄 읽다가 두고 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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